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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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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토 2세는 955년에 태어나 983년에 사망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다. 961년 아버지 오토 1세에 의해 공동 통치 왕으로 선출되었고, 973년 부황의 죽음으로 왕권과 제국 권력을 계승했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국내 문제와 이탈리아 정책, 프랑스와의 전쟁 등 다양한 문제에 직면했으며, 특히 슬라브족의 반란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982년 스틸로 전투에서 패배한 후 로마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아들 오토 3세가 황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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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오토 2세 (신성 로마 황제) 초상화
오토 2세의 초상화, Registrum Gregorii 채색 필사본, 기원후 985년경.
칭호신성 로마 황제
재위973년 5월 7일 – 983년 12월 7일
선임자오토 1세
후임자오토 3세
칭호2독일 왕
재위2961년 5월 26일 – 983년 12월 7일
선임자2오토 1세
후임자2오토 3세
칭호3이탈리아 왕
재위3980년 12월 25일 – 983년 12월 7일
선임자3오토 1세
후임자3오토 3세
배우자테오파누 (972년 결혼)
자녀아델하이트 1세
조피 1세
마틸데, 로트링겐 백작부인
오토 3세
왕가오토 왕가
아버지오토 1세
어머니아델하이트
출생일955년
출생지독일 왕국, 작센 공국
사망일983년 12월 7일 (27–28세)
사망지로마, 교황령
매장지성 베드로 대성당
기타 정보
별칭(붉은 오토)

2. 초기 생애

957년 이복 형 슈바벤 공작리우돌프가 이탈리아 원정 중 열병으로 사망하면서[30] 오토 2세는 오토 1세의 후계자가 되었다. 961년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서 공동 통치 왕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아헨에서 대관식을 치렀다[31]. 967년에는 로마에서 교황 요한 13세에 의해 공동 황제로도 대관식을 치렀다.[31]

2. 1. 출생과 유년 시절

오토 2세는 955년에 독일 국왕 오토 1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이탈리아의 아델라이드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아들이었다. 957년까지 오토 2세의 형인 하인리히(952년 출생)와 브루노(953년 출생)가 사망했고, 오토 1세의 첫 번째 부인 잉글랜드의 에드기트 소생의 아들 리우돌프도 사망했다. 형들이 죽으면서 두 살의 오토는 오토 1세의 상속자가 되었다. 오토 1세는 사생아인 마인츠 대주교 빌헬름에게 오토 2세의 문학적, 문화적 교육을 맡겼다. 작센 동부 변경백 오도는 어린 오토에게 전쟁 기술과 왕국의 법적 관습을 가르쳤다.[1]

오토 1세는 이탈리아 원정을 떠나기 전, 보름스에서 제국 의회를 소집하여 961년 5월, 여섯 살의 오토 2세를 공동 통치자로 선출했다. 오토 2세는 나중에 삼촌 쾰른 대주교 브루노에 의해 아헨 대성당에서, 아마도 성령강림절(5월 26일)에 대관식을 치렀다.[1] 오토 1세는 왕위 계승을 확보했지만, 계승권은 관습법에 따라 성년이 된 아이에게만 부여할 수 있다는 왕국의 불문법을 위반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제국 칭호를 얻기 위해 이탈리아 원정을 떠나는 것과 관련된 높은 위험 때문에 이와 같은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오토 1세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갔고, 오토 2세는 독일에 남아 있었으며, 두 대주교 브루노와 빌헬름이 그의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이탈리아에서 3년 반을 보낸 후 오토 1세는 965년 초에 신성 로마 황제로서 독일로 돌아왔다. 오토 1세는 죽음 이후 왕조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황제 대관 3주년이 되는 965년 2월 2일에 오토 2세를 다시 자신의 상속자로 확정했다.[1]

2. 2. 공동 통치자

961년 5월, 오토 2세는 여섯 살의 나이로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서 아버지 오토 1세에 의해 공동 통치자로 선출되었다.[1] 같은 해, 아헨 대성당에서 쾰른 대주교이자 삼촌인 브루노에 의해 대관식을 치렀다.[1] 오토 1세는 왕위 계승을 확보했지만, 이는 성년이 된 아이에게만 계승권을 부여할 수 있다는 왕국의 불문법을 위반한 것이었다. 오토 1세는 교황으로부터 제국 칭호를 얻기 위한 이탈리아 원정과 관련된 위험 때문에 이러한 조치를 취했다. 오토 1세가 이탈리아로 떠난 동안, 오토 2세는 독일에 남아 두 대주교 빌헬름과 브루노의 섭정 하에 있었다. 965년 2월 2일, 오토 1세는 오토 2세를 다시 자신의 상속자로 확정했다. 967년에는 로마에서 교황 요한 13세에 의해 공동 황제로 대관식을 치렀다.[31]

2. 3. 테오파노와의 결혼

961년 보름스에서 아버지 오토 1세에 의해 공동 통치 왕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아헨에서 대관식을 치렀다.[31] 967년에는 로마에서 교황 요한 13세에 의해 공동 황제로도 대관식을 치렀다.[2]

오토 1세오토 왕조와 동쪽의 마케도니아 왕조 사이에 결혼 동맹을 모색했다. 오토 2세의 즉위는 동쪽과의 결혼 협상을 가능하게 했다. 6년 후인 972년에 새로운 비잔틴 황제 요한 1세 치미스케스 치하에서 결혼과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오토 1세는 전 비잔틴 황제 로마노스 2세의 딸인 안나 포르피로제니타를 원했지만, 그녀는 황실 태생이었지만 당시 5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동쪽에서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요한 1세 치미스케스 황제의 선택은 그의 조카 테오파노였으며, 그녀는 군인 황제의 결혼한 조카였다. 972년 4월 14일, 16세의 오토 2세는 14세의 동방 공주 테오파노와 결혼했고, 테오파노는 교황에 의해 황후로 즉위했다.[32]

3. 황제 즉위와 통치

961년 보름스에서 아버지 오토 1세에 의해 공동 통치 왕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아헨에서 대관식을 치렀다.[31] 967년에는 로마에서 교황 요한 13세에 의해 공동 황제로도 대관식을 치렀다.

968년부터 971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이탈리아 남부 풀리아에서 전쟁을 벌였다.[30] 972년 오토 2세는 동로마 황제 요한 1세 치미스케스의 조카 테오파노와 결혼했고,[32] 테오파노는 즉시 교황으로부터 황후로 대관식을 치렀다.

973년 아버지 오토 1세가 사망하면서 오토 2세는 왕권과 제국 권력을 계승했다. 이후 제국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의 반란은 978년에 진압되었고,[33][34] 서프랑크 왕국과의 분쟁은 980년에 화해로 마무리되었다.[35][36]

980년 말부터 이탈리아 원정을 시작, 981년 추수감사절을 로마에서 보내며 대립 교황 보니파시오 7세와 대립하던 교황 베네딕토 7세를 지원했다.[37] 이후 이탈리아 남부 정복을 시도했으나, 콜론나 곶 전투에서 이슬람 군에게 대패했다.[37]

983년 제국 동북부에서 서슬라브족이 반란을 일으켜 브란덴부르크 등이 파괴되고 제국 판도가 축소되었다.[38] 오토 2세는 이 반란에 대응하려던 중 12월 7일 말라리아로 사망했고,[38] 구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치되었다.[39]

3. 1. 국내 문제

오토 대제가 사망했을 때, 오토 2세의 원활한 황위 계승은 오래전부터 보장되어 있었다. 오토 2세는 오토 대제가 사망할 당시 12년 동안 독일 왕이었고 5년 동안 황제였다. 아버지와 달리 오토 2세에게는 왕위를 다툴 형제가 없었다. 973년 5월 8일, 제국의 귀족들은 오토 2세 앞에 모였고, 코르베의 비두킨트에 따르면, 오토 2세를 아버지의 후계자로 "선출"했다.[3] 오토 2세의 첫 번째 행위 중 하나는 마그데부르크 대주교의 권리와 재산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오토 2세가 평화롭게 왕위를 계승했지만, 권력의 내부 분열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황제로 재위한 첫 7년 동안 그는 내부 경쟁자와 외부의 적에 맞서 제국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끊임없이 매달렸다.

오토 대제가 963년부터 972년까지 직면했던 국내 문제는 그의 죽음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작센 귀족들은 제국 동쪽 국경에 위치한 마그데부르크 대주교구에 계속 저항했다. 오토 1세가 설립했지만, 교구의 정확한 경계에 대한 세부 사항은 오토 2세와 그의 조력자들에게 맡겨졌다. 오토 2세의 결혼과 테오파누는 작센 귀족들이 황제가 그들의 이익에서 멀어졌다고 느껴 불리하게 작용했다. 오토 2세의 주요 조언자 중, 구 작센 귀족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사람은 메츠의 디트리히 1세 주교뿐이었다. 그의 다른 조언자들은 제국의 여러 공작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975년에 임명된 마인츠 대주교 윌리히스는 960년대 오토 대제의 두 번째 이탈리아 원정 이후부터 오토 2세의 조언자였지만,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977년에 오토 2세의 재상으로 임명된 후 979년에 보름스 주교로 임명된 보름스의 힐데발트 역시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니었다.

오토 대제는 또한 죽기 전에 이탈리아의 문제들을 명확하게 정리하지 못했다. 오토는 973년 교황 베네딕토 6세 임명 직후 사망했다. 974년 베네딕토는 크레센티 가문의 요새인 산탄젤로 성에 갇혔다. 오토 2세가 황제의 대표인 시코 백작을 보내 그를 석방하려 하자, 크레센티우스 1세와 추기경-부제 프란코 페루치(후에 대립 교황인 보니파시오 7세)는 베네딕토를 여전히 감옥에 있는 동안 살해했다.[3]

대관식 이후, 오토 2세와 그의 어머니 아델라이데 황후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오토 대제의 죽음에서 974년 부활절까지, 과부 황후는 항상 황제를 동행하여 그와 함께 제국 전역을 여행했다. 그러나 아델라이데와 테오파누는 서로가 오토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불신하여 가정 내에서 갈등을 일으켰다. 978년 오순절 직전에 오토 2세와 아델라이데의 마지막 만남이 마련되었지만, 평화로운 결과는 얻지 못했고, 아델라이데는 부르고뉴로 물러나 그녀의 오빠인 부르고뉴의 콘라트 왕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오토 2세는 삼촌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세의 후손들과 지속적인 평화를 추구했다. 국내의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 오토 2세는 973년 6월 27일, 밤베르크와 슈테가우라흐에 있는 제국의 성들을 그의 사촌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에게 넘겨 통제하도록 했다. 이는 젊은 바이에른 공작에게 충분하지 않았는데, 그는 아버지 오토 대제 아래에서 그랬던 것처럼 슈바벤 공국에서 그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어했다. 973년 7월 4일, 아우크스부르크의 울리히 주교의 죽음은 사촌들 사이의 갈등을 극에 달하게 했다. 오토와 상의 없이 하인리히는 그의 사촌 하인리히를 아우크스부르크의 새로운 주교로 임명했다. 아우크스부르크는 슈바벤-바이에른 국경의 서쪽에 위치해 있었고, 하인리히의 매형인 슈바벤 공작 부르차르트 3세의 영토였다. 자신의 공국이 아닌 곳에, 또한 제국의 지시 없이 주교를 임명하는 하인리히의 행동은 오토와 부르차르트 모두와 갈등을 일으켰다. 내전을 원치 않았던 오토는 973년 9월 22일, 하인리히를 주교로 서임했다.

973년 11월 12일, 부르차르트가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하인리히의 누이인 슈바벤의 헤드비히와의 결혼으로 자녀를 낳지 못했다. 명확한 후계자가 없자 하인리히는 오토에게 그를 새로운 슈바벤 공작으로 임명해달라고 요구했다. 황제는 사촌의 원대한 야망을 감지하고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대신 오토는 그의 이복 형제인 리우돌프의 아들인 오토를 공작으로 임명했는데, 리우돌프는 한때 슈바벤 공작이었다. 이 임명 전, 오토는 슈바벤에서 하인리히의 영향력 확대를 오랫동안 반대해 왔다. 사촌 대신 이복 형제의 아들을 임명함으로써 오토는 제국 전역의 주요 직책에 가까운 가족 구성원을 임명하는 아버지의 정책을 강화했다. 이 임명은 오토 대제의 후손들을 다른 친족보다 선택 과정에서 우위에 두었고, 오토 2세와 하인리히 2세를 더욱 분열시켰다.

젊은 오토를 슈바벤 공작으로 임명한 것은 하인리히에게 제국 왕위에 대한 그의 주장에 대한 공격이자 그의 명예에 대한 모욕으로 여겨졌다. 그는 그의 조언자 프라이징의 아브라함 주교와 함께 974년에 폴란드 공작 미에슈코 1세, 보헤미아 공작 볼레슬라프 2세와 오토 2세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몄다. 역사적 자료에는 음모자들의 목표가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하인리히 2세는 그의 명예를 회복하고 제국에서 두 번째로 영향력 있는 인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려 했을 것이다. 음모에 대한 소식을 들은 뷔르츠부르크의 포포 주교는 하인리히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오토 2세에게 복종하거나 파문을 당할 것을 요구했다. 오토 대제가 제국 통제하에 교회를 통합하려는 노력은 이러한 종류의 행동을 정상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하인리히와 그의 추종자들은 무력 충돌이 일어나기 전에 오토 2세에게 복종했다. 그러나 오토 2세는 음모자들을 엄하게 처벌했다. 하인리히는 잉겔하임에, 아브라함 주교는 코르베이에 투옥되었다.

976년까지 하인리히는 바이에른으로 돌아왔다. 오토가 그를 감옥에서 풀어줬는지 또는 그가 탈출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돌아온 후 하인리히는 오토에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제국을 통치한다고 주장했다. 하인리히는 작센 귀족들을 오토에 대항하여 동원했다. 특히 하인리히는 오토가 작센 전통을 고수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은 메르제부르크의 변경백 메르제부르크의 군터, 백작 외눈의 에그베르트, 베틴의 디트리히 1세와 강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반란에 대응하여 오토는 하인리히에게 공작 지위를 박탈하고 그를 파문했다. 그 후 오토는 군대를 남쪽으로 진격시켜 바이에른으로 진격하여 하인리히의 거점인 레겐스부르크를 포위했다. 오토의 군대는 마침내 도시의 방어선을 뚫고 하인리히를 보헤미아로 도망가게 했다.

카린티아 공국(주황색)은 바이에른 공국(보라색)의 몰수된 영토에서 오토 2세에 의해 만들어졌다.


하인리히가 폐위되자, 976년 7월 오토는 남부 독일 공국의 재편성에 관한 광범위한 칙령을 발표했다. 그는 바이에른 공국의 크기를 거의 3분의 1로 줄였다. 오토는 잘려나간 바이에른 영토에서 남부 독일에 카린티아 공국을 설립했다. 바이에른에서 베로나 변경백령을 박탈함으로써 오토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바이에른 공작들의 영향력을 크게 줄였고, 이탈리아에 관한 제국의 정책을 일반적으로 축소했다. 오토는 작아진 바이에른 공국을 슈바벤 공작인 그의 조카 오토에게 넘겨주었고, 하인리히 3세를 카린티아 공작으로 임명했다. 이러한 임명은 오토 대제와 정치적 연관성이 없는 개인, 심지어 그에게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을 임명하는 그의 정책을 이어갔다.

남부 독일 문제가 해결되자 오토 2세는 하인리히를 물리치고 체포하는 데 집중했다. 보헤미아에 대한 첫 번째 침공에 실패한 후 오토는 977년 8월 두 번째로 보헤미아로 진격했다. 보헤미아에 있는 동안 바이에른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아우크스부르크의 주교와 새로 임명된 카린티아 공작은 하인리히에 합세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오토는 보헤미아에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4] 황제는 슈바벤과 바이에른의 공작의 도움을 받아 파사우에서 반란군을 만났고, 오랜 포위 공격 끝에 그들을 복종시켰다. 오토는 978년 3월 31일 제국 의회에서 반란군을 퀘들린부르크로 데려왔다. 볼레슬라프는 예우를 받았고 오토에게 충성을 맹세했다.[5] 미에슈코 1세는 오토의 왕실 권위를 인정했다.[6] 오토는 하인리히를 위트레흐트 주교의 감시하에 투옥했고, 그는 983년 오토가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오토 대제는 반역한 가족 구성원들의 범죄를 용서했지만, 오토는 다른 정책을 따랐다. 대신 오토는 바이에른 출신 오토 왕조를 자신의 권위에 종속시키기를 바랐다. 하인리히의 네 살 된 아들, 즉 하인리히는 성직자가 되기 위해 힐데스하임으로 보내졌다. 오토는 바이에른 오토 왕조가 바이에른을 세속적으로 통제하는 것을 끝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공작 아래에서 바이에른은 제국의 외딴 지역으로 남았다. 오토는 통치 기간 동안 단 세 번만 바이에른 공국을 방문했으며, 항상 군대를 동반했다.

3. 2. 이탈리아 정책

오토 2세의 이탈리아 정책은 아버지 오토 1세의 정책을 넘어선 것이었다. 오토 1세는 로마에서의 권력 확보와 교황청과의 협력에 만족했지만, 오토 2세는 이탈리아 전체에 대한 완전한 지배를 목표로 했다. 그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요한 1세 치미스케스가 암살되고 바실 2세가 즉위하면서 마케도니아 왕조가 복귀하자, 비잔티움 제국이 지배하는 남부 이탈리아를 합병하려 했다. 이는 그의 아내 테오파누의 영향이 컸다.[32] 그러나 이 정책은 비잔티움 제국뿐만 아니라 남부 이탈리아를 자신들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고 주장하는 파티마 칼리파조와의 전쟁을 의미했다.

오토 왕조의 중부 및 남부 이탈리아 주요 대리인은 오랫동안 롬바르드족 지도자 판돌프 아이언헤드였다. 961년 오토 1세에 의해 베네벤토 공국과 카푸아 공국의 공작으로 임명된 판돌프는 비잔티움 제국과 전쟁을 벌였고, 967년에는 스폴레토 공국까지 오토 왕조의 지배력을 확장했다. 968년 오토 2세 치하에서 판돌프는 살레르노 공국을 제국에 추가했다. 오토 1세와 오토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그의 원정으로 베네벤토, 카푸아, 살레르노 등 남부 롬바르드 공국 3곳이 모두 신성 로마 제국에 통합되었다. 오토 2세의 봉신으로서 판돌프는 북쪽으로는 토스카나, 남쪽으로는 타란토 만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통치했다.[14]

981년 판돌프가 사망하면서 오토 2세는 주요 대리인 중 한 명을 잃게 되었다. 판돌프의 영토는 그의 아들들에게 분할되었지만, 곧 지역 롬바르드 제후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11] 판돌프의 장남 베네벤토의 란돌프 4세는 카푸아와 베네벤토를, 차남 살레르노의 판돌프 2세는 살레르노를 받았다. 판돌프의 사망 소식을 들은 오토 2세는 로마에서 남쪽으로 이동하여 스폴레토의 트라시문드 3세를 스폴레토 공작으로 임명했다. 그 후 판돌프의 조카 베네벤토의 판돌프 2세는 란돌프 4세의 영토를 분할하여 란돌프 4세가 카푸아를 유지하면서 베네벤토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아말피의 만소 1세 공작은 982년에 살레르노의 판돌프 2세를 축출했다.

982년까지 판돌프가 통치하던 지역 전체가 붕괴되면서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오토 2세의 입지는 약화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여전히 롬바르드 공국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했고, 롬바르드 영토로의 진격을 막을 단일 지도자가 없었기에 비잔티움 제국은 북쪽으로 더 진출할 수 있었다. 오토 2세는 판돌프의 사망 이후 롬바르드 공국을 정치적, 교회적으로 그의 제국으로 재통합하려는 시도를 여러 번 했다. 그는 살레르노에서 만소 1세를 포위하는 데 실패했지만, 결국 모든 롬바르드 공국으로부터 그의 권위에 대한 인정을 받았다.

thumb

오토 2세는 롬바르드 제후들에 대한 권위를 재확립한 후, 무슬림 시칠리아의 위협에 관심을 돌렸다. 960년대부터 시칠리아는 파티마 칼리파조의 시칠리아 토후국으로 무슬림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칼비드 왕조의 통치자들은 남부 이탈리아의 제국 영토를 약탈했다. 981년 판돌프의 죽음은 시칠리아 토후 아부 알-카심 알리 이븐 알-하산 알-칼비가 풀리아와 칼라브리아를 공격하며 약탈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980년 초, 오토 2세는 남부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을 돕기 위해 피사 시에 함대를 요청했고,[15] 981년 9월 남부 이탈리아로 진군했다.[29] 무슬림과 비잔티움 제국에 대항하는 원정에서 동맹이 필요했던 오토 2세는 아말피 공작 만소 1세와 화해하고 살레르노에 대한 그의 통치를 제국이 인정하도록 했다.

오토 2세의 군대는 982년 1월 비잔티움 제국의 통치를 받는 풀리아로 진군하여 그 영토를 제국에 합병하려 했다.[16] 오토 2세의 진군은 비잔티움 제국이 남부 이탈리아 소유권을 유지하기 위해 무슬림 시칠리아와 동맹을 맺도록 했다. 오토의 군대는 982년 3월 비잔티움 제국 도시 타란토를 포위하여 점령했는데, 타란토는 풀리아의 행정 중심지였다.[9] 타란토에서 부활절을 기념한 후, 오토 2세는 군대를 서쪽으로 이동시켜 7월 초에 무슬림 군대를 격파했다.[17] 오토에 대한 지하드를 선포한 토후 아부 알-카심은 로사노 칼라브로 근처에서 오토 2세 군대의 예상치 못한 강세를 깨닫고 후퇴했다. 무슬림의 후퇴 소식을 들은 오토 2세는 그의 아내 테오파누와 어린 아들 오토 3세 (제국의 보물과 함께)를 도시에 남겨두고 군대를 이끌고 무슬림 군대를 추격했다.

오토 왕조의 해군 봉쇄로 인해 시칠리아에 있는 그의 거점으로 도망갈 수 없었던 알-카심은 982년 7월 14일 크로토네 남쪽 카포 콜론나의 스틸로 전투에서 오토의 군대와 마주했다. 격렬한 충돌 이후, 오토 2세의 중기병 부대가 무슬림의 중앙을 파괴하고 알-카심의 경비병을 향해 돌진했는데, 토후는 돌격 중에 사망했다.[18] 토후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무슬림 군대는 전장에서 도망가지 않고 재집결하여 제국 군인을 포위하는 데 성공하여 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 황제에게 심각한 패배를 안겼다. 무슬림 역사가 이븐 알-아시르에 따르면, 제국의 사상자는 약 4,000명이었다. 베네벤토의 란돌프 4세와 살레르노의 판돌프 2세, 아우크스부르크 주교 아우크스부르크의 하인리히 1세 주교, 메르제부르크 변경백 메르제부르크의 귄터 변경백, 풀다 수도원의 수도원장, 그리고 수많은 다른 제국 관리들이 전투에서 사망했다.

제국의 패배는 남부 이탈리아의 정치적 구성을 뒤흔들었다. 두 명의 롬바르드 제후가 사망하면서 카푸아 공국과 베네벤토 공국은 란돌피드 가문의 더 어린 분파로 넘어갔다. 비록 무슬림 군대가 승리 후 시칠리아로 후퇴해야 했지만, 무슬림은 남부 이탈리아에서 비잔틴 제국과 롬바르드를 괴롭히며 존재했다. 오토 왕조의 이 패배는 당시 제국 역사상 최악의 패배였으며, 남부 이탈리아에서 제국의 권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비잔티움 제국은 무슬림과 힘을 합쳐 오토 왕조 군대로부터 풀리아를 다시 차지했다.

3. 3. 대 슬라브 봉기

북부 변경주(빨간색 윤곽선)는 북쪽의 빌룽 변경주와 남쪽의 작센 동부 변경주(루사티아 변경주) 사이에 위치해 있다. 빌룽 변경주와 북부 변경주는 모두 대 슬라브 봉기 이후 상실되었다.


982년경, 슬라브 영토에 대한 제국 권위는 동쪽으로 루사티아 니스 강까지, 남쪽으로 오레 산맥까지 확장되었다. 983년 오토 2세가 스틸로에서 패배한 후, 폴라비안 슬라브족의 루티치 연맹은 독일 지배자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이는 대 슬라브 봉기(Slawenaufstand)를 촉발시켰다. 폴라비안 슬라브족은 하벨베르크 주교령과 브란덴부르크 교구를 파괴했다.[20] 독일 연대기 작가 메르제부르크의 티트마르에 따르면, 이 두 교회와 관련된 수십 년간의 강제적인 게르만화와 기독교화가 이들의 파괴 이유였다. 티트마르는 봉기의 원인을 독일인에 의한 슬라브족의 학대로 돌린다. "한때 우리의 종이었던 전사들은 이제 우리의 불의의 결과로 자유로워졌다."[21] 엘베 강을 따라 오보트리테족 영토에서, 루티치족은 봉건 통치와 기독교의 폐지를 목표로 반란을 시작했으며,[20] 므스티보이를 지도자로 하는 오보드라이트 인구의 상당한 지원을 받았다.[22] 부분적으로, 오보드라이트 반란은 성공적이었다. 군주 가문은 부분적으로 기독교를 유지했지만 기독교 기관을 해체했다.[22]

북부 변경주, 마이센 변경주, 루사티아 변경주의 병사들, 그리고 할레르슈타트 주교와 마그데부르크 대주교는 슈텐달 근처에서 슬라브족을 격파하기 위해 힘을 합쳤다.[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엘베 강 서쪽으로 철수해야 했다. 슬라브족에 대한 제국의 기독교화 정책의 성공은 무효화되었고, 빌룽 변경주와 북부 변경주(엘베 강 동쪽 영토)에 대한 정치적 통제권을 잃었다. 오토 1세가 사망한 지 10년 만에 슬라브족을 개종시키려는 그의 평생의 노력이 무너졌다. 엘베 강 동쪽의 슬라브 영토는 추가적인 선교 사업이 재개되기 전까지 1세기 이상 이교도로 남아있게 되었는데, 하벨베르크 주교령과 브란덴부르크 교구의 교회가 재건된 것은 12세기가 되어서였다.

덴마크인들은 슬라브족 반란을 틈타 제국의 북쪽 국경을 따라 슐레스비히 변경주를 침략했고, 소르브족 슬라브족은 작센족으로부터 자이츠 변경주를 침략하고 정복했다.[17]

4. 죽음과 유산

973년 아버지 오토 1세가 사망하자 오토 2세는 왕위와 제국 권력을 계승했지만,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 제국 남부에서는 사촌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가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하는 데 978년까지 시간이 걸렸다.[33][34] 제국 서부에서는 하로트링겐 공작 임명 문제로 서프랑크 왕국과 무력 충돌이 발생했지만, 980년에 양측은 화해했다.[35][36]

알프스 북쪽의 통치를 확고히 한 오토 2세는 이탈리아로 관심을 돌렸다. 980년 말부터 이탈리아 원정을 시작하여 북이탈리아 각지를 순행한 후 로마에 입성했다.[34] 당시 대립 교황 보니파시오 7세와 갈등을 겪던 교황 베네딕토 7세의 지위를 안정시키고,[37] 981년 추수감사절을 로마에서 축하했다. 이후 이탈리아 남부로 원정하여 동로마 제국과 전투를 벌였으나, 시칠리아 섬에서 북상한 이슬람 군에게 콜론나 곶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37]

983년 성령 강림절에 베로나에서 제국 의회를 열어, 콘라트와 하인리히 3세를 각각 슈바벤 공국바이에른 공국의 새로운 공작으로 임명했다. 또한, 아들 오토 3세를 독일 국왕으로 선출하여 황위 계승자로 확정했다.

이탈리아에 머물던 중, 제국 동북부에서 서슬라브족의 반란이 일어나 브란덴부르크 등이 파괴되고 제국의 판도가 축소되었다.[38] 오토 2세는 이에 대응하려 했으나, 983년 12월 7일 말라리아로 인해 2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8] 그의 유해는 성 베드로 대성당 안뜰에 안치되었으며,[39] 이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 묻힌 유일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사례이다.[25]

오토 2세의 사후, 세 살 된 아들 오토 3세가 독일 왕으로 즉위했고, 어머니 테오파누 황후가 섭정을 맡았다.

5. 가계

관계이름비고
조부하인리히 1세
조모링헬하임의 마틸다(마틸데)
부왕오토 대제작센 공작, 독일왕, 이탈리아왕, 신성로마황제
계모유디트(잉글랜드의 이디스)
리우돌프여러 번 아버지에게 반란을 도모하다가 일찍 사망
형수이타
조카콘라트
조카딸리우트가르트
조카사위콘라트 적왕일찍 사망
생모아델하이트(이탈리아의 아델라이데)이탈리아왕 로타리오 2세의 미망인
부인테오파노비잔틴의 황녀, 정략 결혼
1남오토 3세980년~1002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독일의 왕
1녀조피아975년-1039, 간더스하임 수녀원장
2녀아델하이트977년-1044/1045, 크베를린부르크 수녀원장
3녀마틸다979년-1025년, 로트링엔변경백 부인
고모게르베르가(마틸다)
고모부기셀베르트로렌 공작
고종사촌루이 4세서프랑크의 왕
숙부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
사촌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3세황제 하인리히 2세의 아버지



오토 2세는 919년부터 1024년까지 독일(그리고 나중에는 신성 로마 제국)을 통치한 오토 왕조의 일원이었다. 오토 2세는 하인리히 1세의 손자이자 오토 1세의 아들이었으며, 오토 3세의 아버지이자 하인리히 2세의 사촌이었다.

오토 2세는 972년 4월 14일 비잔틴 제국 공주인 테오파누와 결혼했는데,[1] 그녀는 당시 비잔틴 황제였던 요한 1세 치미스케스의 사촌인 포카스 가문 출신이었다.

테오파누와의 사이에서 4명의 자녀를 두었다.

오토 2세와 테오파누의 자녀
이름출생년도사망년도비고
아델하이트977년1040/44년퀘들린부르크 원장
조피978년1039년간데르스하임 및 에센 원장
마틸데979년1025년로타린기아 궁정 백작 에초(에초 가문)와 결혼
오토 3세980년1002년


참조

[1] 서적 Anglo-Norman Studies https://books.google[...] Boydell & Brewer
[2] 문서 Duckett, p. 90
[3] 서적 Lives of the Popes: The Pontiffs from St. Peter to Benedict XVI HarperCollins
[4] 문서 Duckett, p. 100
[5] 문서 Comyn, p. 117
[6] 간행물 Mieszko I
[7] 문서 Comyn, p. 118
[8] 문서 Comyn, p. 119
[9] 문서 Duckett, p. 103
[10] 문서 Duckett, p. 102
[11] 문서 Sismondi, p. 29
[12] 문서 John W. Bernhardt, in Gerd Althoff, Johannes Fried, Patrick J. Geary, eds. Medieval Concepts of the Past: ritual, memory, historiography
[13] 문서 Arnulf of Milan, Liber gestorum recentium, I.11–12
[14] 서적 Early Medieval Italy: Central Power and Local Society 400–1000 MacMillan Press
[15] 문서 Sismondi, p. 91
[16] 문서 Comyn, p. 120
[17] 문서 Duckett, p. 104
[18] 문서 Sismondi, p. 30
[19] 문서 Sismondi, p. 30
[20] 문서 Lübke (2002), p. 99
[21] 문서 Hengst (2005), p. 501
[22] 문서 Lübke (2002), p. 97
[23] 문서 Thompson, p. 490
[24] 문서 Duckett, p. 105
[25] 문서 Norwich p. 253
[26] 문서 Duckett, p. 106
[27] 문서 Comyn, p. 121
[28] 문서 Duckett, p. 107
[29] EB1911
[30] 문서 Schutz, p. 51
[31] 문서 瀬原、p. 87
[32] 문서 瀬原、p. 92
[33] 문서 瀬原、p. 95。973年、ハインリヒ2世の妹婿シュヴァーベン公ブルヒャルト3世が死去した後、オットー2世は異母兄リウドルフの子で自らの甥オットーをシュヴァーベン公位につけた。ハインリヒ2世はこの人事に不満を持った。
[34] 문서 瀬原、p. 99
[35] 문서 瀬原、p. 97-98
[36] 서적 瀬原、p. 98
[37] 서적 瀬原、p. 100
[38] 서적 瀬原、p. 101
[39] 서적 瀬原、p. 1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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